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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08/06/10 ‘괜찮은 아줌마’가 되고 싶은 ‘엄마’란다 by 김진애 (3)
  2. 2008/05/13 요리란 엄마와 시어머님 스타일 by 김진애 (8)
  3. 2008/05/07 엄마만 빠진 엄마의 장례 잔치 by 김진애 (5)
  4. 2008/01/22 짐은 질 수 있는 사람한테 온단다 by 김진애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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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망신시키는 6가지 요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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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천생 아줌마야!”
시장에서 아줌마들과 노닥이는 나를 보고 우리 딸들이 하는 말이다.

“또 수다 떨었지요?”
가게에 들어가서 좀 미적거린다 싶으면 밖에서 기다리던 딸들이 핀잔주는 말이다.

아이들은 아이들답게 ‘아줌마’라는 존재에 대해 부정적인 개념과 안쓰러워하는 개념을 같이 갖고 있다. 아줌마는 무언가 ‘뒤떨어진 사람’이라는 요즘 시절에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다.

“아줌마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니?” 내가 묻는다.
큰딸의 정의는 실(實)을 찌른다.
“자기 얘기하기 좋아하는 게 아줌마 속성이지.” 그 말 맞다.
작은딸의 정의는 허(虛)를 찌른다.
“오히려 남 얘기하기 좋아하는 게 아줌마 아냐?” 똑똑도 하다.
“그 정의로 보면 엄마는 어떤 아줌마니?” 애들은 헷갈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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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길거리에서 하나의 아줌마다. 동네 길에서 공차는 애들에게 소리쳐 야단치고, 우리 집 담장 길을 아슬아슬 곡예 하듯 넘어 다니는 남자 애들에게 버럭 소리를 친다. 우리 딸들 표현에 의하면 ‘겁 없는 아줌마’다. 애들에게, 특히 덩치 큰 남자 애들에게 그렇게 소리 지르다 봉변당하면 어떡하느냐고 걱정스런 표정을 짓기도 한다.

내가 성숙한 여자에게 가장 높은 경외심으로 얘기하는 호칭은
‘괜찮은 아줌마’다.
 
글쎄, 여자들이 아줌마라는 소리를 듣기 싫어한다고 한다지만, 엔간히 나이 먹은 우리 여성이라면 모두 아줌마 아닌가, ‘괜찮은 사람’이 되는 것은 오죽 또 어려운가, 그러니 ‘괜찮은 아줌마’라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썩 괜찮지 않은가.

하지만 ‘괜찮은 아줌마’ 소리를 듣기란 참 만만치 않다. 특히 길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래서 몇 가지 내 기준을 세워보곤 한다. “너무 물건 이것저것 고르지 말자, 주문을 분명히 하자, 찾는 것을 명확히 말하자, 고맙다고 꼭 말하자, 돈은 확실하게 지불하자, 새치기 운전 하지 말자, 무섭다고 피하지 말자, 등등.”

이것 말고도 괜찮은 아줌마가 되기 위한 조건은 훨씬 더 많으리라. 다른 아줌마에게 ‘괜찮은 아줌마’라 들을 수 있으면 분명히 괜찮은 사람일 것임에 틀림없다.

요새 아주 기분 좋은 것. ‘괜찮은 아줌마’들이 무척 는다는 사실이다. 괜찮은 아줌마 이상으로 한 수 더 높여 ‘빛나는 아줌마’라 표현하고 싶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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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아줌마들,
요새 거리에서 자주 만난다.
촛불집회에 ‘유모차’ 끌고 나온 엄마들,
아이들 챙겨 나온 엄마들,
마이크를 무서워하지 않는 아줌마들,
그 연세(?)에 백팩 메고 온갖 것 챙겨 나온 아줌마들,
김밥 말아 나온다는 어떤 블로거 아줌마, 참 빛나는 아줌마들이다.
그 아줌마들이 소리 높여 나를 반가워하면, 덩달아 나도 신난다.

(사진은 데일리 서프라이즈, 황동렬 칼럼니스트님이 찍으신 사진, 빛나는 엄마들 속에 빛나는 아빠도 계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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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힘은 크다. ‘엄마는 뿔났다’만이 아니라 ‘엄마는 빛난다'.

뿔난 엄마들의 힘, 뿔난 아줌마들의 빛나는 힘은 배려, 나눔, 공감, 보살핌, 동참에서부터 나온다. 나의 인생만이 아니라 자식의 인생, 이웃의 인생을 같이 생각해주는 힘이다.
(사진은 한의사 이유명호. 모든 아줌마들에게 힘을 나눠주는 '괜찮은 아줌마'의 고수인
'빛나는 아줌마'.수많은 베스트셀러 중 한 권의 이름이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자궁>이랍니다.)  


딸들아, 엄마는 ‘괜찮은 아줌마가 되고 싶은 엄마’란다.

오늘밤, 빛나는 아줌마들 속에서 괜찮은 아줌마가 되어 보련다.

*** 080610 새벽 김진애 생각

2002년 월드컵 거리응원이 무척 좋았던 중 하나가 여성들이 거리로 진출했다는 현상이었습니다. 통상 스포츠라면 남성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무너졌지요. 마침 태극 패션도 유행하고 페이스 페인팅도 유행하고, 여성들이 거리의 맛을 톡톡이 맛보았지요. 당시 20대 여성들이 주도했던 현상이었지요. 그 여성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했더니 이제 그 여성들이 거리로 나오시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2008년에는 아줌마들도 '겁없이(?)' 거리로 나섭니다. 이제 더 뜨거운 마음으로, 같이 할 사람들과 함께... 사랑하는 남편, 사랑하는 아이들과 함께...
여성의 시민화는 시민사회를 뿌리내리는데 아주 중요한 기본이지요.
생활 이슈를 통해 시민으로 다시 태어나는 '괜찮은 아줌마들' 축복해 주세요.

혹시 이 글 보시는 여성님들 여전히 '아줌마' 소리 듣기 싫으신가요?
길에서 '아줌마' 소리를 들으면 퍼뜩 놀라는 그 순간, 우리 모두 공유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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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wonpp 2008/06/13 15:34  댓글주소  댓글쓰기 수정/삭제

    김진애님은 괜찮은 아줌마가 아니라 똑똑함이 넘치는 아줌마가 아닌가요? 지나친 겸손인듯 합니다.ㅎㅎㅎ

    • BlogIcon 김진애 2008/06/13 16:35  댓글주소  수정/삭제

      '괜찮음'과 '똑똑함'은 다른 개념인것 같아요. 사람으로서 괜찮기란 인생의 계속 진행형 과제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사람은 시행착오가 많은 것이겠지요. 똑똑하다 평해주셔서 감사.^^

  2. 이유명호님은 2008/06/19 13:40  댓글주소  댓글쓰기 수정/삭제

    일전에 인터뷰에서 이유명호님은 "군가산점 폐지되면 여성도 군대가도 좋다"고 했었는데 정작 가산점 폐지되니까 여성의 병역의무 이행에 관해서는 꿀먹은 벙어리가 되셨나봐요.
    본문과는 관계없지만 그냥 이유명호님의 사진을 보니까 생각이 나서 적어봤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싫어하지 않아요. 그 분 말씀은 어리석은 마초보다 훨씬 공감이 가고 설득력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아줌마' 못지않게 20대 초반의 군필자들이 듣기 시작하는 '아저씨'라는 말도 어감이 굉장히 안좋답니다. '아저씨'의 반대말이 '오빠'인건 아시죠? ㅎㅎㅎ 생각해보면 웃기기도 한 이야기죠. 언어가 의식을 결정한다는 사례이기도 하고요.

요리 스타일 전혀 다른 두 어머니를 거친 것은 나의 행운이다.
두 어머니는 정말 다르다.
식솔 많고 집안 대소사 많은 내력과 손 큰 것은 비슷하지만 요리 스타일은 어떻게 그렇게 다를까.

친정 엄마는 한마디로 ‘우르르 쾅쾅’ 스타일이다. 빠르고 거침없이 해낸다. 산본 시댁과 수원 친정과 인천과 서울을 오가며 젊은 시절을 단련했고, 열 명의 아이를 낳은 크나큰 배와 일곱 아이를 키워낸 큰 그릇 덕분 아닐까. 별로 하는 것 같이 안 보이는데 어느새 다 되어 있는 식이다.

시어머님은 한마디로 '조근조근' 스타일이다. ‘진즉 요리계로 나가셨더라면 한 달인 했을 텐데’ 할 정도로 체계적이시다. 그 옛적 일제강점기 기간에 진주여고를 다니셨기 때문일까?(박경리 선생과 비슷한 시기에 다니셨다.)
'첫째, 둘째, 셋째’ 조목조목 짚고, 재료는 이렇게 다듬고, 썰기는 이렇게, 재두기는 저렇게, 담기는 요렇게…, 요리책에 다 쓰기에는 너무도 사소한 그러나 절대적으로 중요한 노하우를 실전으로 가르쳐주신다. 물론 지금도 조근조근 그 잔소리를 그치지 않으시는 것이 유감이지만^^, 요리 배우는 초급 과정에서 시어머님의 ‘조근조근 스타일’은 아주 유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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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아 차일드, 미국 셰프의 전설. 2004년 별세했을 때 <타임>지 표지 모델이 될 정도(좌). 50여 년 동안 미국 요리를 주름잡았다고 할까?  젊은 시절(중), 나이들어(우). '미국 엄마'의 이미지. 튼튼하고 손 크고, 억세고, 일 잘하는... 몸집 크고 갈라진듯 쉬어터진 목소리로 요리하는 TV 프로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요새같으면 전혀 매력없다고 하련만, 그야말로 '실력으로 일가를 이루었다. 나역시 미국에 유학할 때 열심히 그의 프로를 봤다. '미국 고유 음식인 '터키' 굽는 것도 배우고...

요리하는 중
친정 엄마의 레퍼토리는 “빨리 해”.
시어머님의 레퍼토리는 “‘개미’가 있어야지”

‘빨리’와 ‘개미’.
‘빨리’는 나의 모토가 되었고, '개미'는 나의 철학이 되었다.
‘개미’라는 말은 내가 아주 공감하는 진주 사투리다. ‘맛있다’는 말보다 더 진한, 입에 달라붙는, 뭔가 손맛이 느껴지는 정겨운 말이다. '깊은 맛', '바로 그 맛'이라고 하면 어떨까. 나는 ‘빨리’와 ‘개미’를 입에 붙이고 산다. '우르르쾅쾅' 요리하는 사이사이 조근조근 '개미'를 내는 비법을 낸다고 할까. ('개미'란 말은 경상도 사투리인줄 알았더니, 전주사투리라는 설도 있다. 여하튼 '깊은 맛'이라는 뜻의 '개미', 정말 정겨운 말이다.)

친정 엄마와 시어머님의 메뉴 중 영원히 못 잊을 맛들이 있다.
친정 엄마의 ‘굴깍두기’와 시어머님의 ‘갈치속젓 김치’,
친정 엄마의 ‘갈비찜’과 시어머님의 ‘도미매운찜’,
친정 엄마의 ‘북어찌개’와 시어머님의 ‘된장찌개’,
친정 엄마의 ‘오징어국’과 시어머님의 ‘대구 매운탕’,
친정 엄마의 ‘고사떡’과 시어머님의 ‘빈대떡’,
친정 엄마의 ‘도루묵’(알배기 도루묵을 연탄불에 매운 양념으로 굽는다)과
시어머님의 ‘볼레기’(남해 연안에서 잡히는 우럭처럼 생겼지만 훨씬 작은 생선. 그 고소함은 누구도 못 잊는다) 등 등 등.

친정 엄마와 시어머님의 모든 노하우를 전수하지 못한 것은 정말 아쉽다.  
특히 친정 엄마의 굴깍두기는 명절 때면 온갖 기름진 음식으로 느끼해졌을 때, 모든 딸, 사위, 아들, 며느리, 손주들이 마지막 밥 한 공기 비벼먹기로 유명했는데, 배우려고 맘 먹을 때 그만 엄마가 돌아가셔서 지금도 두고두고 아쉬워하고 있다. 몇몇 딸들이 옛 맛의 기억을 따라 흉내를 내고는 있는데, 엄마의 그 맛은 아니다. 요리란 얼마나 섬세한가.

시어머님의 조근조근한 체계적 요리 전수 방식은 두고두고 요긴하다.
오히려 나는 시어머님의 노하우는 상당히 전수한 듯 싶으니, 체계적 배우기는 그래서 좋은 것이다.
손맛도 체계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진정한 전통의 진화가 이루어지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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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화되고 있다고 하는 '줄리아 차일드'.  영화 속 메릴 스트립이 분장한 줄리아 차일드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너무 줄리아 차일드 같지 않은가. 연어를 든 모습이 너무 그럴듯하다. 우리도 요리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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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대가의 영화화를 기대해볼까.












나도 죽기 전에 요리 책 하나 만들어 보련다.
이 꿈을 이룰지는 모르겠지만...^^
 
무엇을 먹느냐 이상으로 어떻게 만들어 먹느냐가 중요하다.
(요새는 '무엇을 먹느냐'도 너무나 중요해졌지만^^...)
 
요리는 그 사람의 스타일이다.
엄마와 시어머님의 스타일에서 진화한 나의 요리 스타일.

*** 김진애 생각:
언젠가, '요리란 아빠와 시아버님 스타일'이란 말도 나올 것으로 나는 굳게 믿는다.
'요리'란 인생의 가장 큰 맛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남자에게서 요리의 즐거움을 뺏는 것은 분명한 차별이라는 것이 나의 소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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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미? 2008/05/13 15:24  댓글주소  댓글쓰기 수정/삭제

    개미라는 말이 재밋지요. 전주사투리로 알고있는데, 어원이 어떻게 되는지는 잘 모르고... 친정엄마 시어머니에게 전수받는 요리라, 언제가 아빠와 시아버지? 글세올시다... 요새 젊은남자들은 요리도 곧잘하는데, 그사람들이 아빠와 시아버지가 될 때?

    • BlogIcon 김진애 2008/05/14 05:00  댓글주소  수정/삭제

      인터넷서핑을 해봤는데, 아직 '개미'의 어원을 못찾았답니다. 어디 사투리인지도. '진주'는 영남과 호남의 가운데 있어서 '맛'에 있어서나 '어휘'에 있어 사투리도 섞여있어서, 개미라는 말이 영남사투리인지 호남사투리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개미' 참 재미있는 말이지요? 우리 아이들도 '개미가 없어...'라는 말을 잘 쓴답니다.

  2. 전경희 2008/05/13 15:32  댓글주소  댓글쓰기 수정/삭제

    선생님의 글을 인터넷서핑하다가 뵙게 되었습니다. 너무 반갑습니다.얼마전 선생님께서 오래전 출간하신 자서전을 인상깊게 읽었기 때문에 제가 알고있는 김진애 선생님께서 이 홈페이지를 운영하신다는 다는 것을 알고 참 반가왔습니다.늘 최선을 다해서 사시는 모습이 멋지고 부럽습니다. 많은 이들의 역할모델이 되시는군요.
    일만 잘하시는 줄 알았는데 요리까지...하여튼 뭐든지 최선을 다하시니까 좋은 결과물이 나오는군요. 앞으로도 글 잘 보겠습니다. 건강하세요!

    • BlogIcon 김진애 2008/05/14 04:58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반갑습니다. 우리 여성은 '요리하기' 의무를 가져서 행복하다고 생각합시다. '의무방어'하기 가끔 싫을 적도 많지만, 요리하기는 인생의 축복이니까요. 전경희님도 공감하시지요?

      제가 썼던 책 <나의 테마는 사람 나의 프로젝트는 세계>는 자서전은 아니고 에세이책이지요. 자서전은 한 백살 살아보고 쓸지 말지 고민할까 한답니다.^^

  3. 2008/05/14 01:21  댓글주소  댓글쓰기 수정/삭제

    비밀댓글 입니다

    • BlogIcon 김진애 2008/05/14 04:55  댓글주소  수정/삭제

      제가 폐교를 운영하는 것은 아니고, '오마이뉴스'가 운영하는 강화폐교의 '오마이스쿨'을 취재한 블로그기사를 썼었는데, 인기높은 기사입니다. 폐교 임대가 교육청과의 계약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만, 공익적 목적으로 폐교 임대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나 임차자로서 여러 불안정성이 있다는 얘기도 듣고 있습니다. 혹시 구체적 사항은 제 멜로 보내주시면 귀담아듣고 정책제도개선의 기회를 보도록 하겠습니다.(2008jk@jkspace.net)

  4. BlogIcon 흑묘백묘 2008/07/07 03:24  댓글주소  댓글쓰기 수정/삭제

    정말 공감가는 글이에요~~. 요리가 취미인데 이런 재미있는 기쁨을 모르고 살았던때를 떠올려보면 정말 억울하더라구요 ㅎㅎㅎㅎ 나중에 며느리에게까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자식들(특히 아들)에게는 요리를 가르쳐줄 욕심이 가득 있답니다~~.

    • BlogIcon 김진애 2008/07/07 05:25  댓글주소  수정/삭제

      '근사한 남자' 한 분 태어나시겠군요.^^ 저의 야망(?) 이었었는데, 아들이 없어서 시도조차 못한 프로젝트였었답니다. 남자들이 요리의 재미를 알게 되면 비로소 삶의 맛을 알게 된다는 제 철학. 근사한 아드님 기대합니다.^^


엄마가 돌아가셨다. 너무도 갑자기. 화사한 봄날, 손녀 결혼식 날이었다. 한복 준비에 목욕재계에 머리 손질에 하루 종일 너무 들뜨셨던 모양이다. 뇌졸중. 나도 예식장에 가다가 발길을 돌려 병원으로 달려갔다. 이미 의식불명. 뇌수술을 받고 의식이 없는 채 나흘을 버티다 가셨다.

한 해 빠진 팔순. 남들은 '호상'이라 하겠지만 이별 연습을 전혀 못한 상태에서 이별을 한지라 가슴이 미어진다. “내가 아무리 몸이 약하더라도 니 아버지 묻고 일 년 있다 떠난다더라.” 수십 년 전 들었다는 점괘를 철썩 같이 믿던 엄마를 우리도 덩달아 믿어 줬었다. 그게 자연스러워 보였고 그렇게 소망했었기 때문에. 인생은 모르는 것이다.

보통 엄마. 온갖 집안대소사에 일생을 바친 엄마.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를 거친 세대답게 생활력 치열한 엄마. 열 아이를 낳아 세 아이를 가슴에 묻고 일곱 아이를 키운 엄마. 언제나 바지런하게 자신의 ‘유쾌한 프로젝트’를 만들며 살아온 엄마. 맏이가 아니면서도 집안 어른 역할을 하면서 “짐은 질 수 있는 사람한테 온단다.”는 말을 뇌던 엄마. 언제나 이 딸을 나보다 더 믿어 줬던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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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도 울어서 뇌가 터져 나갈 것 같다. 그나마 장례식이라는 형식 덕분에 아픔을 견딜 수 있는 게 아닐까.

장례식은 일가 모두가 만나는 자리다. 결혼식에는 빠지더라도 여간해서 장례식에는 빠지지 않는다. 그런데, 일가가 모이면 어디서 사단이 나서 감정의 골이 터질지 모른다. 영화 <축제>에서 장례식에 뿔뿔이 흩어진 일가친척들이 모여 아귀다툼하며 싸우다가 결국 마지막 피날레에서 다 같이 환하게 웃으며 사진 한 장 찍는 것으로 마감하던데, 그 짝이 날 수도 있는 상황이 장례식이다.

(우리 언니가 그린 엄마의 젊은 초상. 돌아가신 후 1주기에 그려서 보내줬다.
옛 사진을 보고 그렸단다.
항상 내 책상 옆에 있다.)



별로 싸울 일 없는 우리 집에도 역시 사단은 있었다. 말로만 들던 ‘종교 전쟁’. 장남 하나, 딸 여섯은 기독교, 가톨릭교, 불교, 무교 등 다양한데, 가톨릭교는 언제나처럼 중립을 지키고 불교식이냐, 기독교식이냐가 문제였다. 엄마는 평생 불자인데, 문제는 단 하나뿐인 아들과 며느리가 기독교라는 사실이다. 게다가 엄마는 그 시대 엄마답게 죽기 전에 기독교에 귀의하겠다는 말을 했었고 며느리는 그 말을 철썩 같이 믿고 고집을 세운다. 아들은 난감한 처지에 빠졌고, 조금 있으면 친척, 외척까지 나서서 대대적인 종교 전쟁이 날 판이다.

“니 엄마 평생 절에 다녔잖니. 불교식이 자연스럽지. 그래도 니 오빠가 기독교식으로 하자면 그렇게 하도록 해.” 아버지의 말씀이라니. 나는 아들 눈치 보는 아버지가 안되어서 눈물을 쏟았고, 아들 내외 눈치 보느라 기독교에 귀의하겠노라고 말하던 엄마 심정이 생각나서 또 눈물을 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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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엄마다. 엄마는 이 모든 논쟁에 지혜롭게 종지부를 찍었다. 엄마가 20여 년 전 준비했던 수의를 가져오니 거기에는 온몸을 쌀 수 있는 다라니경이 들어 있던 것이다.

결국은 절충식이 되었다. 장례 중에는 꽃 바치고 싶은 사람은 꽃 바치고, 절하고 싶은 사람은 절한다. 발인에는 스님과 목사님을 같이 모신다. 장례 중 제상은 올리지 않도록 한다. 사십구재는 엄마가 다니던 절에 모시도록 한다. 아, 이 모든 것을 타협하는데, 가족 일가 간의 신경전은 오죽하던지. 종교 분쟁의 실체를 피부로 느낄 만했다. 한 분 계신 목사 친척이 스님과 공동 주관할 수 없다고 하는 바람에 떨떠름해졌는데, 결국 오빠의 친구 장로가 대신 기도를 올려 주었다.

그 와중에 있던 에피소드. “왜 남자를 찾으세요?” 중환자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데, 상황을 알려 주려 나온 남자 의사가 여자들만 있자, “남자 가족은 없나요?” 묻는 것이었다. 그 와중에도 어찌나 화가 나던지, 아니 남자 아니면 가족도 아닌가, 가족회의 후 알려 달라고 하면 되잖아? 그 남자 의사도 내 반응에 멈칫했다. 울 엄마가 보셨으면 “그래, 맞다 맞어.” 할 일이었다.

딸 하나는 장례 중 제상을 안올린다고 내내 툴툴댔는데, 드디어 울면서 하는 말이라니, “엄마가 사흘 동안 쫄쫄 굶었단 말이야.” 나는 그 와중에도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전통 제례에 익숙한 동서와 고모들도 “니 엄마가 얼마나 조상을 잘 모셨는데...” 하며 영 못마땅해 하신다. 묘소에 가시며 “내가 여기 물통 하나 준비했다. 니 엄마가 지금 얼마나 목이 타겠니?”
아, 제사란 참 중요한 거구나!

***

엄마의 입관. 온몸을 씻기고 마지막으로 얼굴을 드러내니 뇌수술을 하느라 삭발한 머리가 드러났다. 평소 그렇게 수술을 무서워했던 엄마의 머리에 난 수술 자리에 모두 통곡을 한다. 그런데 나는 엄마의 삭발 모습에 오히려 마음이 평안해졌다. “엄마가 드디어 출가를 하는구려. 보살이 되는구려. 열반에 드는구려. 그 모든 고통을 뒤로하고...” 엄마가 이제야 평안해진 것 같았다.

절에 모셨다. 엄마 앞에 잘 차려진 제상, 스님의 염불, 엄마의 웃는 얼굴, 엄마는 이제야 자연스러워 보인다. 가장 엄마다워 보인다. “항상 혼자 오시더군요.” 스님의 말씀에 눈물이 솟았다. 왜 나는 엄마와 함께 절에 가 주지 못했을까? 엄마가 가족을 위해 절을 올릴 때 왜 나는 그 옆에 있어 주질 못했을까?

“엄마만 빠진 잔치구나. 엄마가 보면 얼마나 좋아할까.”
내 말에 온 가족이 고개를 끄덕인다.

장례는 잔치다. 흙에서 흙으로 돌아가는, 평생의 업보를 돌아보는, 나도 언젠가 같이 할, 사랑하는 사람들이 안녕을 하는, 평생의 수고를 도닥여 주는 잔치. 내가 기독교에서 가장 좋아하는 말은 “수고하라”다. 엄마는 기독교인은 아니었지만 평생 수고하셨다. 그 수고에 고마워하는 기념 잔치.

“참 좋은 사람이었다!” 아버지의 단순한 한마디에 그동안 무덤덤했던 아버지에게 서운했던 모든 감정이 단숨에 털어졌다. “인마, 나한테도 엄마야!” 계속 빈소를 지키는 머리 허연 오빠 친구에게 가서 쉬라고 하니까 하는 말이었다. 아들의 여섯 친구를 당신 아들처럼 만들었던 엄마. “딸들보다 아들 친구들한테 더 잘해 줬나 봐.” 딸들의 흉은 사실 그대로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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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은 결국 아들의 친구가 쓰기로 하여 나는 씁쓸해했었다. 대신 나는 오빠 친구에게 몇 년 전에 썼던 “엄마의 배는 크디크다”라는, 엄마에게 쓴 연애편지 같은 긴 글을 주었다. 나중에 비문을 보고 나도 흡족했다. ‘무거운 짐을 가볍게 지셨다’는 그 비문의 한 구절이 정말 엄마다웠다.






엄마 떠나는 떠들썩한 잔치 이후, 이젠 엄마의 묘소 앞에 모일 것이다. 일가친척 중 유일하게 무덤이라는 집을 가지게 된 엄마. “니네 엄마는 복도 참 많구나.” 하는 친척들의 말답게, 항상 모이기 좋아했고, 거둬 먹이기 좋아했고, 사람들이 즐거워하면 그 자체가 즐거웠던 엄마는 떠난 후에도 여전히 사람들을 모이게 하는 힘을 발휘할 것이다.

물론 종교 분쟁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고 제례 형식에 대해서 온갖 분란도 있겠지만, 그것도 살아가는 과정의 한 부분이다. 엄마, 걱정 마세요. 엄마 굶게 하지 않을게요. 아들딸 가리지 않고 돌아가며 제사를 지낼게요.

엄마에게 이별 편지를 쓰는 지금, 엄마가 몹시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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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버이날 생각:

'울 엄마', 4년 전 5월에 돌아가셨습니다. 어린이날 하루 전. 가정의 달이라서 더 그립답니다.

왜 ‘엄마’는 이렇게 언제나 ‘엄마’인가요? ‘어머니’ 보다 언제나 ‘엄마’지요. 홀로 남으신 울 아버지, 넷째 딸과 함께 사시는데, 최근 부쩍 약해지셨습니다.

부모님 살아생전 같이 시간을 보내는게 가장 좋은 효도지요. 각별한 어버이날 보내세요...

(엄마만 빠진 엄마의 장례 잔치.
하지만, 엄마는 거기 계셨다.
지금도 엄마는 여기 계신다.)

  박경리 선생님이 어린이 날 별세하셨지요. 우리 엄마는 5월 4일에 돌아가셨답니다. 이제 5월의 어린이날에서 어버이날에 거쳐 두 분을 같이 기억할 것 같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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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CeeKay 2008/05/08 01:46  댓글주소  댓글쓰기 수정/삭제

    '장례 잔치'라는 표현이 눈물과 슬픔만 있을 것 같은 죽음을 새롭게 보게 하네요. 처음 글 읽을 때는 이번에 돌아가셨다는 소리인 줄 알았는데 다행히도(?) 지난 '잔치' 이야기군요.^^;
    가정의 달, 미국에 있다는 이유로 그냥 전화로만 때우는 데 이번에도 저는 '엄마'한테 그냥 전화로 때울 수 밖에 없겠네요.

  2. BlogIcon 김진애 2008/05/09 06:26  댓글주소  댓글쓰기 수정/삭제

    엄마의 장례에서 또 많은 걸 배웟지요... 죽음이 있어 삶이 뜻있는 것 같아요. 오늘 박경리 선생님 흙으로 돌아가시지요. 통영 미륵산에 가신답니다. 엄마와 박경리 선생님 같이 기억할 것 같아요. 저도 엄마 생전에 '전화로만' 한 적이 많답니다. 그래도 엄마는 좋아하세요.

  3. BlogIcon 김진애 2008/05/09 14:15  댓글주소  댓글쓰기 수정/삭제

    교환학생으로 미국에 가있는 딸에게서 오늘 아침 전화가 왔습니다. 거기는 오늘이 어버이날이니까. 블로그에 들어와 '엄마만 빠진 엄마의 장례 잔치'를 읽고 할머니 생각에 펑펑 울다가 잠을 설쳤다고 하네요...

    '미국 쇠고기' 얘기도 한참 했지요. 거기서도 학생들 사이에 얘기 많이 된다고 하네요. 걱정들이 많더군요.

  4. 박정선 2008/05/27 16:20  댓글주소  댓글쓰기 수정/삭제

    그 잔치라는게 그렇게 슬프더라구요..
    3개월 선고받은 시한부 인생이지만..2년 가까이 버티시고 돌아가실때..
    축하드려야겠지만..축하보단..그 아픔을 내가 대신 짊어지지 못했다는것이
    너무나도 가슴아픈 일이었습니다...
    잔치를 성대하고 멋지게 치르기 위해서는 준비가 많이 필요하겠네요..
    선생님이 표현하신..'잔치'가 멋지네요..
    아직 전 어리지만..저의 '잔치'날이 돌아왔을때는 남들에게 슬프지 않은 잔치였으면 좋겠습니다...

    • BlogIcon 김진애 2008/05/28 06:18  댓글주소  수정/삭제

      '장례 잔치'라는 말을 쓰기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엄마의 장례를 떠올리면 그 잔치 분위기 같은 속에서도 언제나 울먹울먹 하게 됩니다. 엄마는 영원히 엄마인가 봐요... 박정선님은 그래도 이별 연습을 3개월 하실 수 있었군요. 저의 엄마는 갑자기 가서 더 슬펐어요. 가시는 분께는 행복한 죽음이라고 하지만, 남아있는 사람들에겐 너무 섭섭하고 쓸쓸해서.

인생에서 ‘단’ 한 사람만 꼽는다면 단연 엄마다 엄마.

엄마는 “짐은 질 수 있는 사람한테 온단다.” 라는 명언을 남겼다.
엄마의 수많은 명언 중에서도 가장 인상에 남는 말이다. “아래 보고 살아!” 라고 아버지가 저녁 밥상에서 되뇌던 명언이 검약과 절제의 미덕 보다 어쩐지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엄격한 계율로 다가왔던 반면, 엄마의 명언은 어쩐지 용기를 줬다. “그래, 질 수 있어! 나는 어떤 짐을 지어야 할까?” 하고 스스로 용기를 찾게 만드는 말이었다. 

말이란 그 사람의 삶이 바탕이 되어야 힘이 실린다. 엄마의 묘비에 적힌 문구처럼 엄마는 ‘무거운 짐을 가볍게 지셨다.’   

자식 열을 낳아 셋을 잃고 아들 하나와 딸 여섯을 키운 엄마. 지금 같은 저출산 시대라면 훈장이라도 받아야 하겠지만, 그 당시엔 ‘자식 많은 짐’에 더하여 ‘딸 많은 죄’까지 져야 했다. 나는 사춘기 시절에 엄마가 딸 많은 죄를 자처하는 게 영 못마땅했지만, 이제는 너무나 잘 이해한다. 그 역할이 일취월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의 딸들은 여전히 여자라는 원죄를 지고 살아야 하는 경우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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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둘째 며느리임에도 불구하고 큰어머님이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큰며느리 역할을 하면서 대가족의 대소사를 돌보며 평생을 사셨다. 차라리 엄마가 애당초 큰 며느리였다면 의무에 더하여 권리까지도 누렸으련만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역할은 하되 나서지 못하고 조용하고 조심스럽게 역할을 해야 했다. 엄마의 그런 위상이 안쓰러운 적도 많았지만, 그 지혜를 배울 수 있었다.

우리 사회에서 권리를 주장하지 않으면서도 일을 해내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엄마의 사전에는 ‘희생’이나 ‘봉사’라는 단어가 없는 것 같았다. 다만 필요한 그 일을 했다. 필요한 그 역할을 자청해서 했다. 이왕 해야 하는 일이라면 스스로 맡아서 그 일을 잘 하고 그 일을 즐기는 게 보람이라는 것을 몸소 보여줬다.  
 
나는 엄마를 믿었고 엄마는 나를 믿어주었다. 나는 엄마가 꿋꿋하게 그 자리에 항상 있을 것을 믿었고 힘들 때 기댈 수 있음을 믿었다. 엄마는 내가 꿋꿋하게 홀로 설 것을 믿었고 내 판단에 따라 짐을 질 것을 믿어주었다. 믿음을 받는 것만큼 큰 힘이 되는 것은 없다.

서울공대에 원서를 넣을 시절. 엄마는 남들이 그렇게 말리고 하물며 담임선생님도 말리고 아버지는 불같이 화를 내셨음에도 불구하고, “니가 판단한 일인데.”하며 혼자 가서 원서를 넣고 오셨다. 나는 엄마가 정말 자랑스러웠다. 엄마는 정말 뭘 믿고 그랬는지 모르겠다. 나도 나를 못 믿을 시절이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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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공대 시절



엄마는 내가 미국 유학 갈 때 큰아이를 열 달 동안 맡아주었는데, 엄마가 했던 말은 간단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니까.” 딸의 아이까지 열 달을 키워주었으니 엄마의 배는 정말 크디크다. 엄마는 내가 큰 배를 안고 임신 막바지에 일할 때도 “자기 하고 싶어 하는 일인데 뭘. 뱃속에 있을 때가 더 편하단다.”하고 간단히 정리해 주셨다.  

박사학위를 받았으니 교수를 하든지 연구소에 가서 일하는 게 당연하다고 할 시절에 내가 창업이라는 힘든 길을 택할 때에도 걱정이 태산 같으면서도 엄마는 “니가 선택한 길이니까.” 하고 담담하게 받아들이셨다. 누구도 흔쾌히 도와주지 않을 때 엄마는 쌈지돈까지 털어서 도와주셨다. 물론 엄마는 “잘해서 갚아야 해.” 라는 말을 빼놓지 않으셨다.  
  
남들은 당연히 비례대표를 해야 한다고 했을 때, 내가 2004년 정치 입문하자마자 국회의원 지역구 선거에 출마해야 한다고 하자, 엄마는 “네가 옳다고 생각해서 하는 일이니까.” 한마디 하셨을 뿐이다. 하지만 낙선한 뒤 보름 뒤에 엄마가 갑자기 돌아가셨을 때에, ‘엄마가 속으로 은근히 힘드셨나 보다.’ 싶어서 나는 더 펑펑 울었다.   

지금도 사이사이 엄마의 목소리가 들린다.

힘들지? 잘 먹고 해라. 짐은 질 수 있는 사람한테 온단다.
그 어려울 때마다 엄마가 나를 안 믿어주었더라면 나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내가 선택한 길, 내가 선택한 방식을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가장 큰 믿음이다.

나는 나의 두 딸들도 믿어주려 한다. 딸들의 성공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딸들의 선택에 대한 믿음이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의 모든 딸들도 믿어주려 한다. 짐은 질 수 있기 때문에 오는 것이라 믿는다. 성공이 아니어도 좋다. 네가 선택해라. 너의 선택을 믿어주련다. 너는 네가 선택한 짐을 짊어질 수 있단다. 짊어질 수 있기 때문에 너는 그 짐을 선택하는 것이란다.


짐은 질 수 있는 사람한테 온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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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1/22 14:56  댓글주소  댓글쓰기 수정/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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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8/01/22 14:57  댓글주소  댓글쓰기 수정/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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